한창 열을 올리며 업무에 매진하고 있던 금요일 오후 4시쯤, 어머니께 카톡을 하나 받았다. 평소에 업무 시간에는 아무리 급해도 잘 연락을 하시지 않는 어머니의 성향을 알고 있어서 조금 놀란 눈으로 톡을 읽었다. ‘아버지가 오늘로 학교와 이별을 하셨다.’는 단촐하면서도 묵직한 한 방(🥊)이 있는 문장은 뜨거운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서둘러서 아버지께 연락했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교사라는 직업에 최선을 다하셨는지 알기 때문에 퇴직하는 날도 몰랐던 내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버지의 회신은 어머니의 것보다 더 뜨거웠다. ‘이제야 하나의 가정(家庭)에 더 집중 할 수 있어서 홀가분하다’고. 그동안 아버지가 책임졌던 누군가의 자식들에 대한 학습적인 삶의 결정의 순간들이 최선으로 가득했음을 너무 잘 느낄 수 있었다.
운명처럼 아버지의 카톡을 받기 몇 분 전에 나는 누군가의 삶에 중요한 선택에 의견을 제시하는 업무를 진행했다. 수강생분들과 다채롭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고민을 듣고 내 생각을 말하는 업무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정말 만날때마다 다양하지만 결은 같았다. ‘불안과 두려움’ 처음 배우는 것들로 인해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나도 지난 5개월간 느꼈다. 그래서 공감을 펼친다. 그들이 혼자만 불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누구나 그 시점에서 두려운 것이 맞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내 의견을 전달하면 보통의 상대들은 안심을 하거나 조금 더 고민을 해보고 내가 제시한 방향대로 선택한다. 우쭐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내 생각대로 자신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돌아서서 혼자 불안해한다. 종종 내가 말한 방향과는 거의 반대에 있는 의견을 말하는 수강생도 있다. 그분들에게는 스스로 고민한 내용이 얼마나 값진지 다시 알려주고 선택에 후회가 생기지 않을 수 있도록 또 다른 사례를 찾아 알려준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선을 떠넘기는 정도다.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가족’을 위해 여러번의 선택의 길에 섰을 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누군가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요즘 정말 깊게 깨닫는 중이기에 37년간 고생하신 아버지가 지금 보다 더 커 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